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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코로나 방역 '사회적 거리 0m'의 쾌거..."이웃간 볼키스를 멈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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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코로나 방역 '사회적 거리 0m'의 쾌거..."이웃간 볼키스를 멈추세요"

[쿠바와 코로나19] ③ 커뮤니티, 바이러스를 막는 첫 번째 방어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코로나의 본토 침공에 속수무책이다. 월드오미터 기준으로 7월 15일(현지시간) 미국 코로나19 신규 확진자는 하루 7만 명을 넘어섰고, 하루동안 10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997명) 뿐만 아니다. 자본주의의 성지인 미국 뿐 아니라 자본주의 탄생지인 유럽에서도 영국, 프랑스 등 주요 국가들 역시 맥을 못 추고 있다. 무섭게 경제가 성장중인 중국, 인도, 브라질은 말할 것도 없는 상황이다.

여기, 우리가 외면해 온 작은 나라가 있다. '저개발국'이라 치부되던,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세계, 쿠바에도 코로나19는 찾아왔다. 그러나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2020년 7월 3일까지 쿠바의 누적 확진자는 2400명 이하이고, 총 사망자는 86명이다. 사망률도 WHO의 평균보다 낮은 3.6%이다. 쿠바는 어떻게 코로나를 극복하고 있을까. <프레시안>은 현재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교에 재학중인 김해완 씨가 본 '쿠바의 의료 체계'와 관련된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

뻬스끼사(전편 "쿠바에는 코로나 자가진단 '인간 앱'이 동네마다 있다?" 참조)에 참여하면서 나는 내 구역 주민들의 이름을 거의 다 외웠다. 세 달이면 충분했다. 이름뿐인가? 인원수, 연령대, 이웃 간의 관계, 가족 분위기까지도 대략 파악하게 되었다. 매일 얼굴을 보고 말을 섞은 시간의 힘이었다. 주민들도 나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진 것인지, 커피를 권하기도 하고 아침 수다를 떨기도 했다.

세 달 전에는 주민들과 생판 남이었던 내 정보력이 벌써 이만큼 늘었다. 그렇다면 몇 십 년 째 가깝게 붙어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자기들끼리 얼마나 가까울 것인가? 쿠바인들은 웬만해서는 이사를 안 간다. 또, 무엇을 하든지 사람의 손이 많이 가는 쿠바에서는 일상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웃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평소에 이웃들과 관계를 긴밀하게 맺어놓아야 한다. 먼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이 곧 내 형제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지금 뻬스끼사를 도는 의대생들은 자기 집에서 도보 가능한 뽈리끌리니꼬에 출석하고 있는데, 이들마저도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란 주민들이다. 이웃집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 수 있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런 사회에서 살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사태 앞에서 지구상 온 인류는 긴급 미션을 받았다. 개체 사이에 거리를 벌리고, 무조건 접촉을 줄이라는 것이다. 접촉을 사랑하는 쿠바인들에게 불리한 미션이다. 쿠바 정부는 대중교통을 끊고 고속도로를 가로막음으로써 주민들을 거주지에 고립시켰다. 텔레비전 방송은 쿠바의 기본 인사법인 볼 키스와 포옹을 멈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이 커뮤니티 내부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상적인 접촉까지 멈췄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이웃과의 소통은 이곳에서 일상이 유지되는 기본 형식이기 때문이다.

쿠바처럼 촘촘한 커뮤니티를 기반 삼는 사회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더 취약할까?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 안전해진다는 이론이 옳다면 그게 정답이다. 그러나 쿠바의 현장을 들여다보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커뮤니티는 단순히 여러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모아놓은 ‘익명의 집단’이 아니다. 그 속에는 삶이 있고 관계가 있다. 또한 커뮤니티 속에 사는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바이러스가 오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사물이 아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처럼 살아 있는 커뮤니티는 바이러스의 위험을 일차적으로 걸러내는 필터 역할을 해낸다.

커뮤니티가 바이러스에 대항할 수 있는 까닭은 바이러스의 익명성을 해체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인체에 병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숙주의 이름까지 지워버리는 힘이 있다. 이것이 전염의 특징이다. 전염의 물결 속에서는 행위의 주체와 객체가 불분명해진다. 전파자가 원해서 바이러스를 얻은 게 아니니 그 역시 피해자다. 확진자 역시 곧바로 전파자가 될 수 있으므로 그 역시 가해자다. 이 가운데에서 진정한 행위의 주체는 바이러스겠지만, 바이러스라는 존재는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만 실재하기 때문에 따로 분리해서 인식하는 게 불가능하다. 사람과 바이러스를 분리할 수 없다는 조건 때문에 확진자들에게는 ‘반인반수(半人半獸)’도 아닌 ‘반인반균’이라는 새 지위를 부여된다. 감염이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른다는 정보의 공백 때문에 경계 범위는 ‘모든 타인’으로 넓혀진다. 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누구든 말려들기 쉬운 전염병 속에서는 하나의 익명만 남는다. 확진자 n번.

그런데 모두가 모두를 아는 동네에서는 이런 복잡한 게임이 불가능하다. 정보의 공백이 생기기에는 서로의 삶이 너무 촘촘하게 얽혀 있고, 이웃을 ‘확진자 n번’으로 취급하기에는 너무 오래 동안 서로를 알아왔다. 가령 앞집에 사는 ‘안토니오’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렸다고 치자. 딱 봐도 엊그제 스페인에서 도착한 후 격리 당한 사촌을 도와주러 갔다가 바이러스를 얻어온 것 같다. 이웃들은 걱정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토니오를 ‘몇 번째 확진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몇 십 년 동안 이웃으로 알고 지내면서 먹거리를 주고받은 사이인데, 바이러스가 끼어들었다고 해서 그 시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거꾸로 바이러스가 ‘안토니오의 바이러스’라는 정체성을 얻게 된다. 이것은 그냥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라, ‘술을 좋아하고 어린 딸을 사랑하고 어제 앞집에 망고를 선물했고 요즘 일자리가 없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안토니오’에 탑재한 코로나바이러스가 된다. 이 바이러스가 무사히 떠나야 안토니오의 어린 딸도 슬퍼하지 않고, 망고도 다시 선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커뮤니티가 안전해질 것이다.

이것이 디테일의 힘이다. 우리는 거대 집단을 추상화하는 통계 수치보다 한 개인의 구체적인 일화에 더 쉽게 마음을 뺏긴다. 약 백 년 전에 스페인 독감이 그 당시 전 세계 인구 1%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정보는 잘 실감나지 않지만, 인도에서 한 미혼모가 코로나바이러스로 목숨을 잃고 아이 홀로 남겨졌다는 뉴스에는 마음이 아프다. 이런 온도차는 우리 뇌가 가진 상상력의 한계이자 공감 능력의 한계일 테다. 하지만 이런 좁은 마음과 협소한 공감력을 역이용할 수도 있다. 작고 오래된 커뮤니티가 바이러스를 포위하면 바이러스의 익명성이 제거된다. 그러면 바이러스와의 전투에서 몇 가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쿠바의 거리 ⓒ프레시안(박세열)

첫 번째 장점은 공공의 정보력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지난 회에 언급했듯이 쿠바에는 신용카드도 없고 스마트폰 사용도 일상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개인을 동선을 추적하는데 반드시 테크놀로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안토니오’가 평소에 어디를 돌아다니는지, 또 누구를 만나고 다니는지 같은 블록에 사는 이웃들은 이미 알기 때문이다. 이들의 협조를 받으면 의료인들도 쉽게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첨언을 하자면 이것은 서구 언론과 아시아 언론 사이에서 벌어지는 ‘집단의 안전을 보장할 의무 VS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권리’의 신경전과 상관이 없다. 쿠바에는 원래 사생활 개념이 희박하다. 신상 정보의 공유는 커뮤니티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현상이다.

두 번째 효과는 공포에 뿌리내린 혐오를 막아준다는 것이다. 인간은 상대의 얼굴을 모를 때 더 쉽게 원색적인 비난을 던진다. 얼굴을 직접 본다면 차마 꺼낼 용기도 없을 말들을 가볍게 던진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관계라는 이유도 있지만, 공포심은 상대방의 정체를 모를 때 더 강렬해지기 때문에 또한 그렇다. 이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서 이름 모를 확진자를 향하는 집단적인 감정에서 잘 드러난다. 그 속에는 비난, 분통, 피로, 공포가 역동적으로 뒤섞여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이 내가 숟가락 숫자까지 아는 가까운 이웃이라면 어떨까? 그 사람이 어떤 경로로 전염병을 얻게 되었는지 그 사정까지 눈에 훤하다면? 감정에도 자연스럽게 제동이 걸린다. 상대방에 대한 화보다는 걱정이 먼저 앞서고, 화가 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함께 감당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바이러스가 걱정스러운 것은 매한가지지만, 이 사건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얼굴 보고 살 사람과의 관계를 끝장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은 커뮤니티에 살면 쉽게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

세 번째 효과는 커뮤니티가 사람들의 건강을 블록 단위로 묶어준다는 것이다. 같은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 끊임없이 접촉한다. ‘사회적 거리 2m’라는 지침은 이 영역 안에서 완전히 무색해진다. 하지만 역으로 주민들은 자기 블록 밖으로 잘 움직이지 않는다. 가족과 이웃을 통해서 일상의 관계가 충족되기 때문에, 굳이 다른 사람을 만나러 멀리 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배치에서는 전염병의 확산이 자동적으로 차단된다. 바이러스가 공동체 안으로 침입했다고 해도 위기는 크게 번지지 않고 딱 그 블록 안에서만 끝난다.

한 번은 내가 속한 진료소에서 확진자가 아홉 명이 나온 적이 있었다. 몰래 파티를 했다가 사단이 났다고 했다. 그날 전국적으로 스물 한 명의 확진자 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숫자가 더 충격적이었다. 앞으로 동네 이곳저곳에서 출몰할 환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의사들과 의대생들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확진자가 3명만 추가되고 사태는 그대로 종료되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이 시국에 파티를 할 만큼 무방비한 사람들도 웬만해서는 자기 구역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 외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쿠바인들의 촘촘한 커뮤니티는 성공적으로 방역을 치르고 있다. 사회적 거리 0m로 이뤄낸 신기한 쾌거다. 대도시의 개인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이나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대형 관리 시스템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효과가 잘 와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창의력과 조직력 아닐까? 어떤 불리한 조건에 처하더라도 알맞은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다. 그리고 이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관계가 필요하다. 주민들은 뻬스끼사에 나선 의대생들에게 늘 고맙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뻬스끼사가 효과를 괜찮게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동네 커뮤니티가 튼튼하게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의식 있는 커뮤니티는 어디서나 방역의 일차적인 방어선이다.

거리 두기에 정답은 없다. 코로나바이러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멀찌감치 뒷걸음질 칠 때조차, 스텝을 밟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서로의 스텝을 조금씩 베끼고 훔치면서 최선의 안무를 짜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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